윤석열 대통령이 ‘노무현의 남자’로 불린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경제고문으로 위촉한다. 대통령실은 “15일 오후 변양균 대통령 경제고문에 대한 위촉식이 열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행정고시 출신인 변 전 실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 차관과 장관에 이어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경제 관료 출신 인사다. 노무현 정부 경제사회 정책의 뼈대를 만들 정도로 노 전 대통령의 신뢰를 받았던 인물이다.

윤 대통령의 이번 인사에 대해 여러 면에서 파격적이란 말이 나온다. 노무현 정부 말기 정권을 휘청이게 만든 변 전 실장과 신정아씨의 스캔들을 수사했던 검사가 당시 대검찰청 중수부 소속이었던 윤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검찰은 변 전 실장에게 뇌물수수·업무방해·알선수재 및 직권남용의 혐의를 적용해 구속기소했다. 이후 변 전 실장은 개인사찰인 흥덕사에 특별교부세가 배정되도록 압력을 넣은 혐의(직권남용)만 인정돼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변 전 실장이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것도 아니라 대통령실 관계자 중에서도 소수만 알았을 만큼의 깜짝 인사다. 그래서 대통령실 내부에선 이번 위촉을 의아해하는 분위기도 있다.

 

 

신정아 그는 누구인가? 감옥에 다녀온 뒤 밝혔던 신정아의 본심 #큐레이터 #예일대 #누드 #월간조선 인터뷰

 

석방 후 근황과 심정, ‘부적절한 관계’로 알려졌던 변양균 전 청와대 실장과의 관계를 털어놓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낯선 사람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어둡고 음울하고 슬픈 여자의 얼굴이었습니다.
더 이상 미워질 곳이 없을 만큼 미워진 제 얼굴을 보고는
아주 오랫동안 멍하게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 “편법으로 학위를 취득하기는 했지만, 학위를 위조한 것은 아니다”
⊙ (변 전 실장과의 관계에 대해) “세상의 모든 위선과 제약을 넘어서서 서로 교감하고 사랑하는 관계”
⊙ 신씨 자신도 자신이 변 실장에게 보냈다는 가짜 연서(戀書)를 읽고 그 정밀함에 놀라
⊙ <문화일보> 보도 누드사진 합성을 입증하기 위해 병원에 가서 수치심 참고 몸 감정받기도
⊙ “나를 도와준 분들이 검찰조사 받은 일들 너무 가슴 아파. 그나마 변 실장님 무죄 입증된 게 다행”
⊙ 미술계로 돌아갈 생각 전혀 없어
⊙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한 남자의 아내로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고 싶어
⊙ 한 남자를 사랑한 것이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지난 6월 초, 미술계에서 존경받는 여성 원로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신)정아, 그 아이는 정말 똑똑하고 우리 미술계에서는 일도 잘하는 아이였는데 우리 사회의 마녀사냥에 희생당했어. 참 안타까운 일이야. 저지른 잘못의 크기에 비해 우리 사회로부터 너무 가혹한 채찍질을 당했어. 권력형 비리로 만들기 위해 부도덕한 섹스 스캔들로 몰아가고 말이야.”
 
  학력 위조 파문으로 시작해 권력층 인사와의 부적절한 관계 등으로 2007년 하반기 내내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신정아(申貞娥)란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있는 기자로서는 이 미술계 원로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점이 가혹했다는 말입니까.
 
  이 원로는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답했다.
 
  “언론인들은 참 무책임하지. 그걸 벌써 잊었나 보지? 그때 신문, 방송, 인터넷 할 것 없이 몇 달 동안 얼마나 시끄러웠어. 사회 곳곳에서 유명 인사들의 학력 위조 파문이 터진 것은 둘째치고라도 알권리라는 미명하에 (신)정아 누드사진을 버젓이 공개하면서 고위층에 성(性)로비한 것처럼 몰아가고, 그래서 엄청난 권력형 비리가 있는 것처럼 분위기 띄우고… 그때의 보도 분위기대로라면 지금 정아는 무기징역을 살고 있어야 돼. 그런데 그 법적 처리 결과가 어떻게 됐어?”
 
  누드 파문 등 ‘야릇한 이미지’로 신정아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기자는 그 원로와의 만남 직후 이른바 ‘신정아 스캔들’을 다시 훑어봤다. 결론은 명쾌했다. 엄청났던 사회적 파장에 비하면 결과는 용두사미(龍頭蛇尾),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이었다.
 
 
  태산(?)이 흔들렸는데 죽은 건 쥐 한 마리
 
  ‘신정아 스캔들’은 2007년 7월 신정아씨의 학력위조에서 시작됐다. 신씨가 예일대 박사학위를 위조해 동국대 조교수에 임명됐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이던 변양균(卞良均)씨와 신씨가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변씨의 외압으로 신씨가 동국대 교수로 임명되는 등의 비리가 저질러졌다는 의혹이었다. 결국에는 한 언론이 신정아씨의 누드사진을 공개한 후 이른바 성(性)로비 의혹까지 불거졌다. 이 사건은 지난 2000년 정국을 흔들었던 ‘린다 김 사건’에 비견되면서 일파만파로 커졌다. 언론은 이 사건에 ‘변양균-신정아 게이트’라는 이름까지 붙여 주었다.
 
  ‘린다 김 사건’은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 국방사업인 백두사업추진 과정에서 이양호 당시 국방장관이 재미 로비스트인 린다 김과 연애편지를 교환하는 등 애정 관계가 얽힌 ‘부적절한 로비’를 받은 의혹이 제기됐던 사건이다.
 
  검찰은 결국 2007년 10월 말 신씨와 변씨를 구속기소했다. 신씨는 가짜 예일대 박사학위 등 허위학력으로 동국대 교수와 광주비엔날레 감독에 임용된 혐의(업무방해)와 자신이 일하던 성곡미술관 공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고, 변씨는 예산 특혜를 약속하고 신씨를 동국대 교수에 임용되도록 한 혐의(뇌물수수), 대기업에 외압을 넣어 미술관 후원금을 내도록 한 혐의(제3자 뇌물수수), 흥덕사와 보광사에 탈법적으로 특별교부금 배정을 지시한 혐의(직권남용) 등으로 구속기소했다.
 
  검찰은 그해 12월 중순, 횡령·배임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다가 2005년 3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당시 김석원(金錫元) 전(前) 쌍용그룹 회장으로부터 ‘석방 청탁’ 명목으로 3억원을 받은 혐의(알선수재)로 변씨를 추가 기소했고, 신씨도 2007년 2월 김 전 회장의 ‘특별사면 청탁’ 명목으로 2000만원을 받은 혐의(알선수재)로 추가기소했다.
 
  이 가운데 법원이 인정한 죄는 신정아씨의 경우 학력위조뿐이었다. 뇌물혐의 등은 무죄 처리됐다. 학력위조와 관련 신씨는 1년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신씨는 2009년 4월 징역 만기일 직전 보석으로 풀려났다. 학력위조 부분에 대해서도 신씨는 여전히 학위브로커에게 속았다는 입장이다. 위조는 아니라는 것이다.
 
  변씨에 대해 대법원은 2009년 1월 말, 뇌물수수와 제3자 뇌물수수, 업무방해, 알선수재 등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다만 흥덕사 등에 특별교부세가 배정되도록 압력을 넣은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명령했다.
 
  ‘게이트’라고까지 명명됐던 사건치곤 싱거운(?) 결말이 난 셈이다.
 
 
  “내 말을 사람들이 믿어줄까요”
제7회 광주 비엔날레 공동예술감독으로 선임됐던 신정아씨와 오쿠이 엔위저(Okui Enwezor)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대 학장.

 
기자는 지난 6월 하순 신정아씨와 연락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미술계 인사와 종교계 인사를 통해 신정아씨에게 인터뷰 의사가 있는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돌아온 답은 “내 말을 사람들이 믿어줄까요?”였다. 신씨 주변 지인들은 아직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큰 것 같다고 했다.
 
  다시 신씨에게 세상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물었다. 이번에 돌아온 답은 “하인리히 뵐이 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책을 한 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선정적인 언론이 한 개인의 명예와 인생을 파괴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성실하게 살아왔던 27세의 평범한 여인인 카타리나 블룸이 언론의 허위 보도와 그에 호응하는 군중에 의해 살인범의 정부(情婦), 테러리스트의 공조자, 음탕한 공산주의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렸다.
 
  신씨의 답에서 신씨가 겪었던 사건의 진실 여부를 떠나 한 여인으로서 그녀가 갖고 있는 상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다시 인터뷰를 요청했다. 신씨의 법적 대리인인 김재호 변호사의 중개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요즘 근황은.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건강도 치유하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보내고 있습니다.”

 
  ―2004년 5월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직접 겪은 후 추진력이 강한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했는데, 당시 긴 시간(24시간) 어둠 속에 갇혀 있을 때의 심정과 1년 반 동안 영어(囹圄)생활의 고통을 비교해 본 적이 있는지요.

 

  “비교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삼풍 사고의 경우는 순식간 일어난 사건이었고, 그 짧은 찰나에 삶과 죽음이 오가는 것을 체험한다는 것은 단순히 ‘고통’이라고만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삼풍 사고 후 저는 헬렌켈러의 <삼일만 볼 수 있다면>처럼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래서 넘치는 열정이 때로는 주변을 힘들게 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것을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언론에 자주 나왔던 용어 중 ‘과욕’이라는 부분이 그랬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 ‘과욕’으로 비칠 수 있었다는 것도 이번 사건을 겪고 알게 되었습니다.”

 
  ―감옥생활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1년6개월의 수감생활은 죽을 만큼의 고통스러운 생활이었지만, ‘살아진다’는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통도, 아픔도, 추억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야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순간도 제가 누구였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살아진다’고 해서 ‘저’를 놓아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겪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운 여름, 추운 겨울 오갈 곳이 없어서 죄를 짓고 징역살이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아픈 사연들을 듣고 바라보면서 그래도 저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끝까지 나를 믿어주신 어머니”
 
  ―책 출간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언제쯤 출간할 계획이고, 내용의 개략을 말해 줄 수 있는지요.
 
  “제가 그동안 겪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쓴 것입니다. 출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사건 전(前)과 후(後), 신정아씨 개인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사건 전에는 ‘불가능’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죠. 사건 후에는 ‘가능’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저 위에 계신 분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건을 겪으면서 가족, 특히 어머니의 정신적 고통이 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서로 어떻게 위로해 주고 위로받았습니까.
 
  “문명사회(출감 후)에 나온 후, 어머니를 한 번 뵈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변호사님께 누차 여쭤본 것이 정말 우리 딸이 그런 사랑을 한 것이 맞는지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억측과 소설이 언론을 통해서 나오는 데도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저에 대한 ‘여자’로서의 신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고통을 제가 무엇으로 위로를 해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생각을 하게 되는데, 행여 저희 어머니나 가족이 변(양균) 실장님을 조금이라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까 봐 저는 제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직접 자신의 성장환경을 말해 줄 수 있는지요.
 
  “할아버지는 식품회사 창업에 관여하시다가 작은 할아버지께 모든 일을 맡기고, 1960년대 말 경북 청송으로 내려가서 주유소를 개업하셨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택시회사와 주유소 몇 개, 버스정류장을 운영하실 정도로 저희 집은 부유했습니다. 부모님께서 가지고 있는 땅이 많아서 제가 어렸을 때에는 제가 사는 청송이 모두 우리 것인 줄 알 정도였습니다. 집안에서는 제가 첫 손녀여서 제가 말하는 것은 뭐든 가질 수 있었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자랐습니다. 오빠 둘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구로 보내져 교육을 받았고, 저는 유일한 손녀딸이라고 초등학교 마칠 때까지는 시골 할아버지댁에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내내 할아버지께서 따뜻한 점심을 먹이기 위해 일일이 학교에 도시락을 싸서 갖다 주셨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붓글씨와 동양화를 배웠고,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웅변, 승마, 골프 등 웬만한 잡기는 모두 조금씩 할 줄 압니다. 큰오빠가 대학에 들어가고, 작은 오빠가 대입 재수를 하게 되자 부모님께서 서울 서초동에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다닐 때 서울로 전학을 와서 오빠 둘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제가 서울로 전학을 온 다음부터는 어머니가 청송과 서울을 오가면서 저희 삼남매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제가 미술 전공 하는 것에 대해 부모님이 끝까지 반대를 하셔서 결국 로스쿨에 가는 조건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만큼 부모님이 저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하였고, 저는 그 기대가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결국 미국유학에서 제가 원했던 그림 공부를 계속 했고, 1994년에는 아버지를 잃었고, 95년에는 삼풍 사고도 당했습니다. 그 후의 인생은 덤으로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제가 원하고, 제일 자신있게 잘할 수 있는 전시기획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그 일을 하는 동안 정말 즐겁고 행복했었습니다.”
 

 

 
 
변 실장과의 관계를 말하다
 
  ―사건을 겪으면서 가장 억울했던 점 하나를 꼽는다면.
 
  “하나를 꼽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신정아’라는 이름 앞에는 항상 ‘학력위조’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고, 신정아의 이미지는 ‘꽃뱀’으로 불립니다. 학력위조와 꽃뱀은 같은 맥락에서의 연장선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은 맞지만, 위조를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위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동국대-예일대 재판 자체만으로도 밝혀진 셈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위조’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것이 많이 속상합니다. 편법으로 학위를 취득하기는 했지만, 제가 위조한 것은 아닙니다.”
 
  신씨의 이야기는 변양균 전 정책실장과의 관계로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꽃뱀’에 대한 이미지도 그렇습니다.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하는데, 누가 ‘꽃뱀’이고 누가 ‘제비’냐를 논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건 당시 직책을 놓고 보면,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그저 평범한 공무원일 뿐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런 중책을 맡을지 예상하고 만남을 시작했겠습니까? 남녀 간의 문제는 당사자만이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내용도 모르면서 온갖 추측과 억측으로 파렴치하고 더러운 인간으로 치부하는 것은 제 개인적으로 많이 아프고 다친 부분입니다.”
 
  ―피하고 싶은 질문이지만, 말이 나온김에 묻겠습니다. 변 전 실장과의 관계와 관련 언론 보도의 어떤 점이 문제라는 겁니까.
 
  “이 부분에 대해 저의 답이 굳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두 사람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모든 위선과 제약을 넘어서서 서로 교감하고 사랑하는 관계였습니다.”
 
  ―당시 시중에는 신정아씨가 변 실장에게 보냈다는 이메일 연서(戀書)가 돌아다녔는데 본 적이 있는지요.
 
  “물론 그 연서는 조작된 연서입니다. 나중에 글을 올린 네티즌이 공개적으로 자백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론의 생리상 나중에 자백을 할 때에는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사실화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사실, 저도 그 연서를 처음 읽었을 때에는 제가 정말 이런 글을 썼던가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정도로 정교하고 정성을 다해 만들어진 글이었습니다. 심지어 새로 일하게 될 큐레이터와 면담에 대한 언급과 마지막에 ‘당신의 신다르크로부터’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눈을 크게 뜨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또한 제 아이디가 ‘신다르크’라는 것까지 글 마지막에 삽입한 것을 보고 너무 치밀하다는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다만, 현대미술을 기획하는 저와 전혀 상관이 없는 복원작업에 대한 이야기와 심지어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조선중기 작품 몇 점이라는 표현에서 웃음이 났지만, 글솜씨만은 대단했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금호미술관이나 성곡미술관은 모두 젊은 작가들이나 현대미술 중심으로 소장을 하기 때문에, 오너들의 개인 컬렉션을 제외하고는 미술관에서 조선중기 작품을 소장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168cm나 되는 큰 키의 저를 놓고 ‘자그마한 체구’로 표현을 한다든지, 첫 정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부분은 웃음이 절로 날 지경이었습니다.
 
  사실 제 나이 또래의 여자들은 남녀 간의 육체적인 사랑을 놓고 ‘정사’라는 표현을 쓰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내용을 편지로 보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이 이 글을 처음 읽게 되면 당연히 제가 썼을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당사자인 저도 읽는 내내 정신을 차렸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제 변론을 맡고 있던 변호인 또한 이 글을 쓴 사람을 저로 착각하고 제 문학성에 놀랐다는 이야기까지 듣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정말 제가 이 조작된 연서처럼 글을 잘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중에 돌아다니던 그 연서를 당시 목포교육청 간부가 여교사에게 보여주었다가 성희롱 논란이 벌어지는 일도 있었는데 모멸감을 느끼지는 않았는지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연서가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연서에 대한 부분은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남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아프게 해야 하는지 슬플 뿐입니다.”
 
 
  미술계 인사들에게 죄송
 
  ―다시 태어난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시간을 돌릴 수가 있다면 한 남자의 아내로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요.
 
  “한 남자를 사랑한 것이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저에게는 지나간 그 사랑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종교생활은 하고 있는지요.
 
  “중학교 때 서울로 전학 온 후 제가 살고 있던 서초동 사랑의 교회에 다녔습니다. 수감생활 중 저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 종교의 힘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종착지도 모르는 채 끊임없이 나타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종교생활은 늘 저에게 긍정의 힘이 되고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신정아씨에게 미술은 무엇이었습니까.
 
  “직업으로서의 미술이 아니라 그냥 ‘신정아’ 그 자체였습니다.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저와 함께하는 일상이었습니다.”
 
  신정아씨에게 마지막으로 미술계 인사들에게 할 말은 없는가를 물었다.
 
  “지난 10년간 제 마음을 다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도덕한 이미지로 미술계를 떠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변양균의 저서 쿠팡 바로가기>

어떤 경제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변양균의 현실과 맞서는 영화 속 한국 경제 특강, 바다출판사

 

Posted by Good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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